(사진제공 : 사진작가 선상근)
미력면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복홀군(伏忽郡)이라 칭하였는데 그 때의 성지(城地)가 화방리 백운산(白雲山) 선인봉하(仙人峯下) 장동(長洞)일대였다.
고려말에는 보성군에 속하였고 조선조말에는 미력재에 있던 미륵암(彌勒岩)에 연유하여 미륵면(彌勒面)이라 불렀는데 서기 1919년에 구용문면(舊龍門面)의 우봉(牛峰), 정자(亭子)와 겸백면(兼白面)의 둔기(屯基)부락을 편입시켜 미력면(彌力面)이라 개칭하고 면소재지를 도개리(道開里)에 두었다.
[도개(道開) : 미력면 도개리] 도개 마을은 마을 주변에 칠도칠석(七道七石)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처음에는 사(思)씨가 터를 잡고 살다가 그후 조(趙)씨와 조선조 말엽에 관산 임씨(冠山任氏)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보성강(寶城江)이 마을앞 300m 지점을 흐르고 있어서 예날에는 호동(湖洞)이라고 불렀으나 마을주변에 복숭아 나무가 많아서 도개(道開)로 불러오다가 조선조(朝鮮朝) 경종(景宗)때 유명한 암행어사(暗行御史使) 박문수(朴文秀)가 마을앞을 지나면서 장차에 큰 길이 열릴 것이라는 뜻으로 도개(道開)로 개칭토록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어 지고 있다. [입석(立石) : 미력면 도개리] 입석(立石)마을은 1500여년전에 김해(金海) 김씨(金氏)가 입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문면(龍門面)에서 미력면에 편입되어 칠석중(七石) 그 일석(一石)이 이 마을에 있어 그 바위 이름을 본따 입석(立石)마을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며 통상 선바우라고도 부른다. [와야(瓦野) : 미력면 도개리] 와야(瓦野) 마을은 조선조(朝鮮朝) 중엽 1489년경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처음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形成)하였다고 한다. 후손은 현재 거주하지 않으며 그후 남평문씨(南平文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은 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기와굽는 가마터가 있었는데 전국에서도 기와 굽는 기술이 유명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땅을 파보면 기와장이 나오고 있으며 그 이름을 따라서 마을 이름을 와야(瓦野)라고 불러오고 있다. [우봉(牛峯) : 미력면 도개리] 우봉(牛峯) 마을은 약400년경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처음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形成)하였으며 보성군(寶城郡) 용문면에 소속되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으로 미력면 도개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뒷산인 우봉산(牛峯山)의 형국이 소와 같다하여 마을 이름을 우봉(牛峯)이라 부르게 되었다. [정자(程子) : 미력면 도개리] 정자(程子) 마을은 약550년경 진주강씨(珍州姜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으나 지금은 없고 그후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입촌하여 살고 있으며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이름은 중국(中國)의 정명도(程明道) 정리천(程利川)선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정자(程子)를 정주내(程州)라고도 불렀으며 두 정씨(鄭氏)와 중국의 학자 주자(周子)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나올것이라는 뜻으로 정주래(程周來)라고 불렀다 하며, 1914년 이전에는 용문면에 속해 있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미력면으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정자(程子) 마을이라 부르고 있으며 정지내라고도 한다. [상화(上化) : 미력면 미력리] 미력리(彌力里)의 형성시기는 고려초기(高麗初期)로 구전되고 있는데 속칭 조도사(趙道士)라는 이가 와서 미륵바위(彌勒岩) 7개를 복내면(福內面)과 경계지점인 미력재로부터 백운산(白雲山) 기슭까지 10리내에 길지(吉地)를 골라 세우고 입석지내(立石之內)는 가거지지(可居之地)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 지역내에 수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번성하자 마을 이름을 미륵암(彌勒岩)에 연유하여 상미륵(上彌勒), 중미륵(中彌勒), 하미륵(下彌勒)이라 칭하였는데 3개 마을중 상미륵은 지금의 상화(上化)이고 중미륵은 지금의 중촌(中村)이며 하미륵은 지금의 춘정(春亭)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이 번성한 당시에는 수백호로 성세를 이루었다고 한다. [중촌(中村) : 미력면 미력리] 중촌마을은 상화(上化) 마을편(編)에 기술(記述)한 바와 같이 중미륵(中彌勒)을 중촌(中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조선조 정조(朝鮮朝 正朝)때 보성선씨(寶城宣氏)와 탐진최씨(耽津崔氏)가 입촌(入村)하여 성촌(成村)케 되었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몇 가구 살고 있다. 마을 건너 보성-광주선 국도변에 쥐업쟁이(周馬亭)이라는 소촌락(小村落)이 1940년경에 형성되어 지금도 5가구가 살고 있는데 군통계년보(郡統計年報)상에는 마을로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백제(百濟) 정벌 때 군사주둔 및 임시 통치소를 두었던 곳으로 이곳이 곧 미력소(彌力所) 자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평촌(平村) : 미력면 미력리] 평촌마을은 1790년경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입거촌(入居村)하였으나 지금은 그 후손이 없고 약150여년전에 평산신씨(平山申氏)가 터를 잡아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으나 그 후손이 타 지역과 도시로 이주하고 마을이 성시(盛時)에는 20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5세대만이 겨우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백운산(白雲山)기슭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앞 들녘이 비교적 평평하고 넓어 마을 이름을 평촌(平村)이라고 하였다 한다. [구기(舊基) : 미력면 미력리] 미력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 하여 구기(舊基) 또는 구기동(舊基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인 백운산(白雲山)에 구계명당(九鷄明堂)에 관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구기(구기)라는 마을명과 무슨 관련이 이 있지 않은가 보아지나 고증할만한 자료가 없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곡리, 구기리, 평촌리, 중촌리를 병합하여 미력리라고 하였으며 통합된 이명(理名)을 미력리(미력리)라고 호칭된 것은 구기 북쪽 500m 지점인 미력재에 미륵입상(彌勒入像)이 있었으므로 미력리라고 한다. [은곡(隱谷) : 미력면 미력리] 은곡(隱谷)마을은 약200년 전인 1780년경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처음으로 입촌(入村)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위치가 통정골(通井谷) 골짜기 밑에 깊숙이 위치해 있어 은곡(隱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장동(長洞) : 미력면 화방리] 장동마을은 백제(百濟)때 복홀군(伏忽郡)의 성지(城址)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에 크게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고려말 당시 선씨(宣氏)터였던 현 보성선씨(寶城宣氏) 성내와 터를 교환하여 이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호(石虎) : 미력면 화방리] 마을주변에 구암(九岩)이 있으며 특히 돌(石)이 많고, 마을 뒷산의 형국이 범(虎)의 형국과 같다하여 이 두가지 문자를 합하여 석로(石虎)라 불리워 졌다 하는데 불경(佛經)에 석(石)자의 음(音)은 돌이며 호(虎)자의 음은 “음”이라하여 돌옴으로 불리워오다 용어(用語)의 편의상 현재 “돌음”(石虎)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죽곡(竹谷) : 미력면 화방리] 두 큰 명산(明山)사이의 큰 열매라고 하여 대실(大實)이라고 불렀는데 뜬봉(마을뒷산)과 죽산(竹山)사이에 끼어 있어서 죽곡(竹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둔기(屯基) : 미력면 화방리] 둔기(屯基)마을은 조선조(朝鮮朝)중엽인 약480년경에 진원박씨(珍原朴氏)와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처음 거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원나라 장군 홀필열(忽必烈)이 중국(中國)까지도 널리 알려진 명당(明堂)인 석호산(石虎山)의 복호(伏虎)를 찾고자 조선땅에 휘하(揮下)의 군대(軍隊)를 이끌고 와서 이곳 강변에 주둔(駐屯) 시켰다하여 둔터(屯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본 마을은 겸어면(兼於面)에 속했다가 1914년 미력면 화방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춘정(春亭) : 미력면 용정리] 춘정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현 굴치 마을 바로 아래 덕진들에 덕진촌(德津村)이 있었다는 사실은 보성군의 변화 1789년 기준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본 덕진촌이 폐촌되고 춘정마을의 형성시기는 상고할 수 없다. 南, 尹, 鄭등 3성이 대종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마을 아래에 미륵암(彌勒岩) 7개중 1개가서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석정이라 하였다가 구한말(舊韓末) 선비 춘암 문종열(春庵文鍾烈)의 호 앞자를 따서 춘정이라고 개정케 하였다. [굴치(掘峙) : 미력면 용정리] 굴치(掘峙) 마을의 형성시기는 상고할 수 없으나, 마을형성과 더불어 남평문씨(南平文氏)가 입향 정착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마을의 이름유래는 백운산(白雲山) 줄기의 남쪽 끝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며 마을의 형국이 엎드린 꿩의 형상이라 하여 복치(伏峙)라고 부르다가 용자편의상 근래에 이르러 굴치라 부르게 되었다. [가마(駕馬) : 미력면 용정리] 가마(駕馬)마을은 서기 1580년경에 전라도(全羅道) 장흥(長興)에서 수원(水原) 백씨(白氏)가 입향 정착(入鄕定着) 하였으나 현재는 그 후손은 1900년 12월 8일 전혀 없고 그 후 보성선씨(寶城宣氏)가 들어와 집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춘정(春亭)마을 서쪽 북동향방(北東向方)에 위치한 마을로 지형이 가마솥 안처럼 오목하게 생겨서 가마(駕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가마골이라고도 한다. [용지(龍池) : 미력면 용정리] 용지(龍池)마을은 약430년전에 설치한 문재도(文載道) 장군의 묘갈명(묘) 위치에 의하면 용제등(龍梯嶝)으로 각(刻)이 되어 있는데 마을의 성촌(成村)여부는 정확히 알 수없으나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일평(文一平)이 최초로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마을의 이름 유래는 마을 바로 앞을 감돌아 흐르는 보성강 속에 깊은 소(沼)가 있는데 이속에 용(龍)이 살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용소(龍沼)라고 불렀는데 그곳에 살던 용(龍) 한쌍이 대룡산정(大龍山頂)으로 구름을 타고 승천(昇天)하였다 하여 용지등(龍池嶝)이라 불리웠다. 마을의 형국(形局)이 배의 모양같이 생겼다 하여 우물을 파지 않았었는데 어떤이가 옛날에 마을 중앙에 우물을 팠더니 밑바닥에서 뱀이 한꺼번에 많이 나왔다는 전설(口傳說)이 전해오고 있으나 현재는 각 가정에 지하수를 파서 마시고 있다. [살래(活川) : 미력면 용정리] 살래 마을의 형성 연대는 상고할 수없으며 행주기씨(幸州奇氏)가 살았다 하나 후손(後孫)은 살지 않으며 조선조(朝鮮朝) 영조26년인 서기 1750년경에 문극주(文極周) 남평인(南平人)이 입촌(入村)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면 소재 대룡산(大龍山)을 옛날에는 활용산(活龍山)이라 하고 앞을 흐르는 상류천(上流川)을 장자천이라 하는데 정자(程子)는 중국(中國) 춘주시대(春秋時代) 진(秦)나라 학자의 정(程)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활용산의 활(活)자와 정자천(程子川)의 천자(川子)를 각각 일자(一字)씩 합하여 활천(活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활기(活氣)와 문학(文學)을 숭상(崇尙)하는 마을이다. [송림(松林) : 미력면 덕림리] 미력면의 영산(靈山)인 대룡산(大龍山)에서 굴기굴복(屈起屈伏) 장룡(長龍)의 형세로 뻗어 내려와 그 산줄기의 한 끝이 마을을 좌우(左右)로 감싸고 도는 듯한 형국(形局)인데 조선조 세종때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최초로 입촌하여 농경을 위해 보를 막고 터전을 잡아 생활하던 중 마을 좌우의 야산에 소나무 숲이 울창함을 본따서 마을 이름을 송림이라고 하였다 [우곡(牛谷) : 미력면 덕림리] 이 마을 뒷 명산인 대룡산은 동남쪽으로 비룡망해(飛龍望海)와 서북쪽으로 비룡망하(飛龍望河) 한 명당이 있다며 풍치 좋은 대룡산(大龍山)에 뻗어 내려온 산줄기 하나가 동(東)에서 서(西)로 흡사 소(牛)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우곡(牛谷)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인근 주민들은 통상 우와실이라고 부르고 있다. [덕래(德來 :더래) : 미력면 덕림리] 덕래마을은 조선조 인조(仁祖) 병자년(丙子年) 서기 1636년에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입향선조(入鄕先祖)인 김알(김알)이 남하(南下)하여 정착(定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의 씨족분포(氏族分布)는 전씨(全氏) 백씨(白氏) 송씨(宋氏)등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은 없고 그 훨씬 전에도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원더래등(峙)너머 새더래(新德)는 김알이 정착이후 생긴 마을이다. [반암(盤岩) : 미력면 반룡리] 반암마을은 마을입구에 솟대미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인왕전씨(人王全氏)가 수백여년전 살면서 벼슬을 하여 솟대기를 꼽아 두었던 곳으로 유래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다 그후 진원박씨(珍原朴氏)가 살아오다 약250년전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입향(入鄕) 정착한 후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대룡산(大龍山) 장맥(長脈) 뻗어내려 마을 앞 동산을 구슬로 삼고, 용(龍)이 새리고 앉아 있는 형이라 해서 용희주(龍戱珠)로 불리우다가 후에 반룡(盤龍)이라하였고, 동네 서쪽 백호등(白虎嶝)끝 어귀에 넓은 바위가 있고, 주작등(朱雀嶝), 하청용등(下靑龍嶝)에도 암석이 있고 또한 암석(바위)에 훈(훈)과 표석(標石)이 있어 반암(반암)이라 불리워졌다. [마산(馬山) : 미력면 반룡리] 마을 뒷등이 말(馬) 형국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북쪽에 마철벽, 코두벽, 빗가리등 말에 따른 지명이 있으며 동쪽의 마을 앞산이 새까금(鳥山)이라고 불리우며 매산바위가 있고 또한 태산(胎山)샘이 있어 말(馬)과 산(山)을 합하여 마산(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말뫼등으로도 불리우다 용어 편의상 말매로 불리우고 있다. [소룡(小龍) : 미력면 반룡리] 옛날에는 우농동(牛農洞)이라 하였는데 농사를 짓는데는 소가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왔기 때문에 유래된 지명(地名)으로 생각되며 하동정씨(河東鄭氏) 입향선조(入鄕先祖)의 묘가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고 하며 마을 부근에 여물번데기라는 지명이나 되는 은행나무 고목(古木)이 있었는데 마을안길 확장을 위하여 1962년경에 베어 없어졌으며 예날에 활룡산(活龍山)이라 불렸던 현재의 대룡산(大龍山)이 마을 뒤편에 있어 대(大)와 소(小)의 상대성(相對性)에 의하여 소룡동(小龍洞)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하나 용어의 편의상 소룡(小龍)으로 불리워 지고 있다. [가평(佳坪) : 미력면 반룡리] 마을 뒤로 대룡산의 중간에 관주산(貫珠山)과 복종산(伏鍾山)의 기봉(起峰)이 수려하고 강정평(江井坪) 장수평(長水坪) 구정평(九井坪) 등 비옥한 농지가 마을 주변에 펼쳐져 있으며 좌로는 쌍룡(雙龍)이 사려있는 듯한 반산(盤山)이 있고 우(右)로는 주현(珠峴)이 있고 들 가운데 쌍봉(雙峰)을 이룬 조산(祖山)이 마을을 향하여 공읍(拱揖) 하고 있는 자태이며 멀리 와장산(臥獐山)이 정면을 수호하는 듯 하고 봉화천(烽火川)이 구비쳐 감싸고 흘러 전후좌우에 이보다 좋은 경관이 없다 한다. 마을 공동 정호(井戶)는 수질이 좋아서 예천(禮泉)이라고 청하여오고 있는데 지금도 주민이 잘 관리하고 있다. [천동(泉洞) : 미력면 반룡리] 마을의 지형이 정남향(正南向)으로 위치하고 있어 추운 겨울날씨에 한파가 불어도 마을앞만 지나면 따뜻한 온기가 돌며 물이 흔해서 심한 가뭄에도 논농사를 짓는데 물 걱정이 없다하여 정동(井洞) 또는 천동(泉洞)이라 부르며 현재(現在) 마을앞 50m 거리 들 한복판에 400여년 전의 샘이 있어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식용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이 샘물의 양이 많아 부근 40여 단보의 농사에도 관수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 자체로 마을의 지형을 본따 마을 이름을 향양동(向陽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당(草堂) : 미력면 초당리] 초당(草堂) 마을은 450년젼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후 성씨가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마을 동쪽에 서당골이 있는데 조선조 말기에 이곳에 서재(書齋)가 있어 후진들을 양성하여 오다가 그 후 이서제는 현 초당(草堂)으로 옮겨 서제의 이름을 초당(草堂)이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초당(草堂)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치(雁峙) : 미력면 초당리] 풍수설에 의하면 앞산과 뒷산의 형태가 기러기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기러기안(雁)자를 따서 안치(雁峙)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지금은 국도 2호선으로 차량통행이 빈번한 미력면과 득량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그럭재라고 부르고 있다. [주현(珠峴) : 미력면 초당리] 주현마을은 원래 농경지였으나 서기 1979년도에 취락구조개선사업(聚落構造改善事業)으로 택지(宅地)를 조성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뒤의 고개 이름을 본따서 주현(珠峴 : 구슬고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당(元堂) : 미력면 초당리] 원당마을은 조선조 초기인 서기 1390년경에 여산송씨(礪山宋氏) 8대조인 송정엽(宋正燁) 송유혁(宋有革) 형제가 충남예산에서 이 마을로 정착(定着)하였고 그 후 광산김씨(光山金氏)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 마을은 보성읍 옥평리와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결원(蛇結院)터가 있어 처음에는 원댕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중엽에 암행어사 이강호(李康鎬)가 이 마을에서 하루밤을 묵으며 원당(元堂)이라 마을 이름을 지어준 것이 지금에까지 이 이름을 부르고 있다. [풍치(風峙) : 미력면 초당리] 그럭재(雁峙)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마루에 고개가 있었다. 고개 마루에 할미당이 있어서 지나는 행인들이 당에 소원성취를 빌었는데 이 재이름을 바람재라고 하였으며 이재의 이름을 따서 바람재 즉 풍치(風峙)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