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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명유래 > 보성,어제와오늘 > 지명유래 > 보성읍

     

     

    (사진제공 : 사진작가 선상근)

     

    1913년 행정구성의 폐합과 토지조사에 따라, 용문면과 옥암면중 대야리 일부를 웅치면에 이속시키고 양면을 폐합 보성면이라 칭하였다. 1914년 보성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인사동(仁士洞) : 보성읍 보성리]

    인사동(仁士洞) 마을은 읍성안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도 북문 거리로 불리우고 있으며 입향성씨는 알 수 없으나 어진 선비가 많이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은 한때 보성군 용문면의 지역 조선초기에는 한식동(寒食洞) 이라 불렀던 기록도 있다.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암면과 병합 보성면이 되면서 일본식 지명인 이라 부르다 1945년 광복후 어진선비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일본식 지명을 배제하고 오늘날의 인사동(仁士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소재지 마을로 군청, 경찰서, 보성등기소, 전기통신공사 보성전신전화국, 보성초등학교, 보성읍교회 등이 있어 관광서의 밀집상태로 보아도 오늘날 인사동(仁士洞)이라는 마을이 어색하지 않는 곳이다.

    [동윤(東倫) : 보성읍 보성리]

    동윤마을은 시가지 동북쪽에 위치하며 향교가 있는 마을로 선조 말 동밭(東田)이라 칭하였듯 밭(田)이 많은 곳으로 1602년(선조 35년)에 향교가 이곳으로 이전되면서 이때부터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일침기에는 읍의 중심가로 발전하여 본정(本町)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으며 현재도 보성읍 중심 상가지역을 이루고 있다. 보성리와 주봉리에 걸쳐 돌로 쌓은 성(보성읍성)이 있었는데 그중간(현 전기통신공사와 보성읍교회)에 문이 있으며 그 문이 동문이었다. 마을 위치가 동문 밖에 있다고 하여 동문밖 또는 동밖이라 불러오다가 1918년 보성면이 되면서 동외라고 칭하였다.
    그 후 1941년 10월 1일 보성읍으로 승격되면서 동쪽에 위치하고 향교의 명륜당(明倫當)이 있다고 해서 한때는 향교동이라 부르다 동윤동(東倫洞)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동(校洞) 교촌리 생못골 향교리)

    [신흥(信興) : (보성읍 보성리)]

    신흥마을이 형성되기전에는 전답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6년 3월 보성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근처에서부터 상가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때 역부근인 현 농협군지부자리에 시장이 형성되었다가 1940년 읍사무소 뒤로 시장이 옮겨져(1950년) 원봉3리로 이전할 때까지 상가지역으로 발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매일시장은 1970년도 양재범 군수에 의해 건립 읍사무소 밑에 위치해 있다.

    1937년 보성리를 분구하여 일본식 지명으로 소화정(昭和町)이라 칭하다가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 현재와 같은 동(洞)의 성격을 띠면서 읍내라 불리워 왔으며 1945년 광복후 일본식 지명의 개칭에 따라 역이었고 상가 지역이라 하여 새신(新), 일어날 흥(興). 즉 새로 일어난 곳이라 하였으나 그 뒤 신(新)자를 믿을 신(信)으로 바꾸어 신흥동(信興洞)이 되었다

    [태평(太平) : (보성읍 보성리)]

    태평마을은 읍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김해 김(金)씨가 제일먼저 터를 잡았다고 전해오지만 입향시기는 알 수 없다. 현재는 김(金)씨와 임(林)씨가 마을의 주류를 이루어 살고 있으나 직장인들이 많아 주민의 이동이 비교적 잦은 곳이다.
    마을입구의 정자나무는 수령 약 300년쯤 되는데 마을의 애환과 그세를 함께 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보호수로 지정관리중이다.
    1937년 7월 1일 보성읍으로 승격되면서 왜식 동명으로 북정(北町)이라 하다가 1945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부평동으로 고쳤다. 마을과 집안이 조용하고 범죄가 없어 평안한 마을이라 예부터 太平洞(대판골)이라 불리워 졌으나 일침기에는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부평동(富平洞)이라고 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마실 (加馬室) : 보성읍 부평2리]

    가마실마을은 읍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양 임(兆陽 林)씨 선조인 세미공(世味公)의 후손이 동촌으로 운집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나 현재는 김(金)씨, 임(林)씨, 최(崔)씨 등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공무원이 많이 살고 있고 청학정(靑鶴亭)(1933년 5월 25일 건립) 등이 있다.
    백제시대는 몰골(沒骨)이라 불렀다 하며 그후 마을 형세가 가마솥과 같다하여 김곡(金谷)골로 불리워오다 일침기에는 가마실(加馬室)로 개칭되었다.

    [담안(墻內) : 보성읍 우산1리]

    우산리는 한때 보성군 용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계리, 송산리, 오야리와 옥암면의 주촌리, 택촌리, 현촌리, 용교리, 송현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인조때 대학자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선생이 살았다 하여 우산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담안마을은 읍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조초엽 중훈대부(中訓大夫)였던 죽산 안씨(安氏)란 분이 최초로 입촌하였으며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낸 그분의 아드님 안범(安範)의 후손들이 취락을 형성 자작일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여러성씨들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조선조 중종 11년(1516) 병자년에는 이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주민을 위해 죽산 안범공(安範公)이 밥과 떡을 만들어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는데 뒷날 이분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마을 뒷산에 담을 쌓아(약 350m) 이를 보은담(報恩墻 : 은혜를 갚는 담장)이라 하였고 보은장 안의 동네라하여 담안(墻內)이라 하였다 한다.

    [택촌(宅村) : 보성읍 우산2리]

    택촌마을은 조선초 세조(1415)때의 사람으로 죽산 안(安)씨 민(民)이란 분이 현재 담안에 터를 잡은 후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을 이루었다. 현재의 택촌(宅村)마을 저수지 위치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연목이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농사를 짓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므로 ‘연못으로 인하여 살기 좋은 마을’에서 연유하여 ‘택촌(擇村)‘으로 불리웠으나 현재는 한자음만 바꿔 ’택촌(宅村)‘이라 쓰여 지고 있다.

    [귀골(貴谷) : 보성읍 우산2리]

    귀골마을은 조선조 숙종때 우산 안방준(安邦俊)선생의 증손인 안수상(安壽相)(동복현감(同福縣監) : 1665~1729)이 마을에 기거하면서 그 후손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은 안수상(安壽相)公이 마을주변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오야(吾野)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마을의 형국이 구시(구유통)형으로 생겼다고 하여 귀골(貴谷)-구싯골-구유골-귀골로 변천되었으며 귀골을 한자음화 하여 귀골(貴谷)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외현(外玄) : 보성읍 우산3리]

    외현마을 조선 초(1415년 세조)때의 사람인 죽산 안민(安民)이 담안(墻內)에서 거주하다 그의 후손들이 밖감질(外玄)에서 생활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안씨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오래전 옛적에 외현사(外玄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어떤 이유로 승려는 흩어지고 절은 폐사가 되어 버렸는데 그 후 외현사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밖감질(外玄)이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내현(內玄) : 보성읍 우산3리]

    내현마을은 세조 때의 사람인 죽산 안(安)씨 민(民)이란분이 담안(墻內) 마을에서 거주하다 그의 후손들이 내현(內玄)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현재는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오래된 옛적에 내현사(內玄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폐사가 되고 말았다 한다. 이후 이곳에 내현사(內玄寺)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안감질(內 : 안내, 玄 : 검을현)이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주촌(酒村), 장두(場頭) : 보성읍 우산3리]

    장두마을은 내현(內玄)과 외현(外玄)마을이 형성된 후 예안현감을 지낸 안범(範)의 후손들이 최초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그후 탐진 최(崔)씨가 입촌하여 안(安)씨와 함께 살아오다가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마을 앞에 삼거리 재(峙)의 형국이 뿔처럼 생겼다 하여 ‘각삼치’라고 불리어 오다가 그 후 보성 5일 시장이 마을 가까이 이거해온 뒤 장머리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두(場頭)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계(柳溪) : 보성읍 우산4리]

    유계마을은 안부자(安富者) 등 3대 진토(進土)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천석궁의 지주들로 매우 평화롭게 살아오다가 감나무집 김(金)씨(성명미상)가 농사를 지으면서 장마가 지면 논이 유실되므로 시냇물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린 뒤부터 마을이 점차 폐촌이되었다 하며 그후 다시 한집 두집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주변에 보성여중, 보성중학교가 양옆에 있다.
    맑은 시냇가 버드나무 울창한 숲사이로 반달형 마을이 펼쳐져 있다 하여 현재의 유계(柳溪)라는 설과 풍수지리학설에 의하면 현재 여중학교가 가마솥 형국이라 하여 류계(流溪)라 했다고 하며 또한 마을이 부촌이었을 때 냇물가에 정자(亭閣)를 짓고 난간에서 문인들이 평화롭게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하여 유계(遺溪)라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솔매(松山) : 보성읍 우산4리]

    솔매마을은 입향 성씨나 마을의 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택촌과 가까이 있는 아래 마을로 사람이 운집하여 살다가 현재의 솔매(松山)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원래는 송곡(松谷)이라 하였는데 큰 솔숲은 없어지고 마을 뒷의 둥그런 산이 아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지명은 본래 솔뫼(松山)였으나 발음하기가 어려워 ‘솔매’로 표기하고 있다.

    [신지(新支) : 보성읍 옥평1리]

    옥평리는 한때 보성군의 옥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강리, 세동리, 유산리, 신지리와 송암리, 덕정리의 일부와 미력면의 가평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넓은 들이 있으므로 옥평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신지마을은 단양 우(丹陽 禹)씨가 최초 입향하였다 하는데 땅이 기름지고 농사짓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옥전(玉田)이라 하였다 한다. 그후 한집, 두집 모여들어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 하며 조선조 말엽에 마을이 있었다 하나 그후 폐촌이 되어 마을이 없다가 다시 (1921년경) 취락이 형성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지’(新支)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때는 ‘낫갓’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동(細洞) : 보성읍 옥평1리]

    세동마을은 봉화산밑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옥평리에 제일먼저 형성되었다 한다. 함양 박(朴)씨가 최초 입촌하였다고 전해오는데 현재는 여러 성씨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양쪽 산줄기가 가늘게 뻗어 내렸다 하여 ‘가는골’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한자어를 적용 세동(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산(酉山) 마을은 흔히 닭재(酉峙)로 더 잘알려진 곳으로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하여 유산(酉山)이란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1988년에 보성-회천간 국도18호선 포장공사로 인하여 닭재의 도로를 변경하게 되었는데 닭의 목부분이 잘려지게 되었다.

    [두슬(頭瑟) : 보성읍 옥평2리]

    두슬마을은 조선조 중엽(1866년경) 함양朴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여 살던중 죽산안(安)씨, 능성 구(具)씨, 하동 정(鄭)씨, 성주 이(李)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120여호가 번영을 누리고 살았으나 현재는 60여호만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옛적에는 옥암면 용강리의 두곡(頭谷)마을이라 하다가 그후 풍수지리설에 의한 마을 지형을 보는 지관에 따라서 와우형(臥牛型) 혹은 비파형(琵琶型)이라 하였는데 비파형(琵琶型)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이 거문고 머리 부분에 위치한다고 하여 두슬(頭瑟)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행정구역으로 옥평2구에 속하나 옥평리의 대표마을로 주변에 신기 세동 유산 송암 쌍룡 등이 있다.

    [송암ㆍ쌍룡 (松岩ㆍ雙龍) : 보성읍 옥평3리]

    송암마을은 봉화산 왼쪽주령 동북방 2km지점(白人侍)의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780년경 예산 송(宋)씨, 공주 이(李)씨가 제일먼저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마을 앞 쌍룡(雙龍) 새터마을은 함양 박(朴)씨가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임란시 왜장 가등청장이 그의 부하들에게 솔송자(松字)가 들어간 마을에는 전승의 여지가 없으니 가지말라는 명을 내렸다 하는데 이후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솔송자(松字)를 따 송암(松岩)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송암을 중심으로 뻗어내린 백악산(白岳山) 주령이 마치 2마리의 용(龍)의 형국가 같다하여 쌍룡(雙龍) 등이라 하였다 한다.

    [덕정(德亭) : 보성읍 봉산1리]

    덕정마을은 보성읍에서 3.5km 남쪽으로 봉화산의 서평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이마을의 형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가야사(伽倻寺)란 절이 있었다 하므로 고려 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여지며 함양 박(朴)씨 충주 지(池)씨, 죽산 안(安)씨 등이 제일먼저 입촌하였다 한다.
    현재는 충주 지(池)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이곳 봉화산 중턱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어 이 동네 이름을 ‘가야’ 마을이라 불러왔는데 언제인가 가야사라는 절이 없어지자 따라서 그 명칭도 달리하여 개너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연유는 서쪽편은 뜰같이 넓다하여 ‘대정(大庭)뜰’이라 하고 남쪽편이 노루의 목같이 생겼다 하여 ‘노루몰’이라 하였다 하며, 이에 대해 북쪽인 마을 뒷산 모양이 ‘개’형상을 닮았다 하여 ‘개너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의 덕정(德亭)은 양정제학당(養正濟學堂)을 개설한 덕정 안창환(安昌煥) 선생이 출생하신 마을이라 하여 후손들이 덕정(德亭)이라 하였다 한다.

    [오서(烏棲) : 보성읍 봉산리]

    오서마을은 읍내에서 약 4.5km 정도 봉화산의 남서쪽 중턱아래에 있는 마을로 김해 김(金)씨가 최초 입향하였다 하며 그후 보성 선(宣)씨가 마을을 형성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새끼 까마귀가 어미까마귀에게 먹이를 잡아다주는 것처럼 효도하는 마을이라 하여 오서(烏棲)라고 불리워지다가 현재는 오서(烏西)로 불리우고 있다.

    [방축(防築) : 보성읍 봉산1리]

    봉산리는 한때 보성군의 옥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축리, 오서리, 선무리, 노산리, 교동리, 덕정리 일부와 장흥군 회령면 신산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봉화산(군산천) 및이 되므로 봉산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방축마을은 진원朴씨가(1380년경) 최초로 입향하였다 하며 그 후손들이 취락을 형성마을을 이루었으나 약 80년전 죽산 안(安)씨, 정(丁)씨, 지(池)씨 등이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주민들은 부업으로 삼베를 짜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중간에 못이 있어 못을 쌓았기에 축동(築洞)이라고 불리워지다가 1941년 행정 구역개편이후 방축골-방축(防築)이라고 불리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노산(蘆山) : 보성읍 봉산2리]

    노산마을은 군소재지로부터 십리(4km)길로 봉화산과 몽중산사이의 심곡(谷)으로 봉화산 지맥인 마주봉(馬走奉)밑에 위치한 이 마을은 양반은 읍시중 불(不)리라하여 산중에 기거하기 위하여(선조 7년 1574년) 보성 선(宣)씨 7대손,이(以)형이 최초 입향하여 그의 후손들이 취락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한학을 중시 후세들에게 교육하므로 부모에 효도하고 이웃이 화목한 마을 48호가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
    한때 장흥군 회령면 노박리(盧朴里)에 속하였다가 194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성읍에 편입되면서 노산이라 하였다 한다.
    노촌의 어원은 ‘갈대마을’ 갈마을 갈몰이며 현재도 ‘갈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산(三山) : 보성읍 봉산리]

    삼산마을은 보성읍에서 회천면에 이르는 국도18호 선변에 위치한 마을은 진산(鎭山)을 몽중(夢中), 매봉 감투봉으로 하고 풍수설의 백호(白虎) 등인 활성산 줄기가 봇재를 이루어 곱게돌아 안산을 이루었다. 따라서 마을이름도 세산이 감싸고 있다고 하여 삼산(三山)이라 붙여졌다 하며 한때 이 마을은 사동(舍洞)이라 불리워지기도 하였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6.25사변에는 매봉아래 기동(基洞)이란 마을이 있었으나 공비들의 괴롭힘과 교통의 불편 등으로 이 마을로 이사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주변에는 잘 가꾸어진 과수원과 차(茶)밭이 있다.

    [온수동(溫水洞) : 보성읍 봉산2리]

    온수동 마을은 활성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회천에 이르는 국도18호선과 교차하여 조그만 다리(橋량)로 이어졌다. 이곳이 일명 ‘냇가주막’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도로와 교통이 발달하기전에는 사람이 걷거나 말(馬)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라 회천(會泉)쪽을 오가던 사람들의 여정(旅情)을 달래주던 작은 주막이 이 냇가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약 100여년전 박(朴)씨성을 가진이가 이곳에 처음 주막을 지었는데 한집 두집이 모여들어 한때는 15호정도의 촌락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마을뒤의 약수가 유명해지자 “따뜻한 약수가 나오는 곳”이라는 온수동(溫水洞)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동암(東岩) : 보성읍 쾌상1리]

    쾌상리는 한때 보성군 옥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암리, 평촌리, 척사리, 건지리, 동암리를 병합하여 쾌상봉(군산천) 밑이 되므로 쾌상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암 마을은 조선명종 5년(1550년)에 죽산 안(安)씨 입향 시조인 안민(安民)의 후손인 안중홍(安重洪)이란 분이 우산리 택촌(宅村)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도 죽산安씨가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지명은 마을옆의 신암(臣岩)을 두름바위라 불렀는데 이곳의 바위가 동쪽이 있으므로 동암(東岩) 이라고 하다가 동암(桐岩)이라 개칭하여 불렀다 한다. 일제시대에 다시 옛 이름을 따라 동암(東岩)이라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가리(飛加里) : 보성읍 쾌상1리]

    동암 마을이 만들어진 약 100여년 뒤에 형성된 이 마을은 최초의 입촌성씨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평촌과 척사(尺紗)의 분기점(分岐點)으로 각 성씨가 거주하며 장흥 임(任)씨ㆍ정(鄭)씨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지세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옥녀척사형(玉女尺紗形)인데 끝자락은 현재의 보성중학교가 있는 옥평리까지 이어진 큰 줄기라 한다. 뒤에는 말(馬)이 날아오르는데, 겸하여 채찍을 더하는 형세이므로 비마가편(飛馬加鞭 : 날으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 이라는 한자말을 줄여 비가(飛加)리라 하였다 한다.

    [평촌(坪村) : 보성읍 쾌상2리]

    평촌 마을은 1639년경 진주 강(姜)씨, 김해 김(金)씨등이 당대 천석(千石)과 백대(百代)자손으로 번창할 것이라는 어느 도승의 점지를 받아 이곳에 정착했다한다.
    활성산 줄기를 타고 상매봉ㆍ하매봉(鷹峰)을 지고 앞으로 평야가 있어 농사에는 적지인 것으로 판단 취락을 이룬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후 200년전 보성 선(宣)씨 죽산 안(安)씨 하동 정(鄭)씨 등이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하응봉(下鷹峰)을 지고 유독 수목이 울창하고 그 앞은 넓은 들이 펼쳐진 곳이라 평촌(坪村)이라 했다 한다.

    [두방(斗防) : 보성읍 쾌상2리]

    두방 마을은 조선중엽 한 도승이 명산을 찾아다니던 중 ‘솔대골’에 이르러 아픈다리를 이끌고 잠시 쉬면서 산아래 저 만큼에 있는 조그마한 ‘연못’을 발견하였다. 산에서 내려와 도승이 지나는 사람에게 연못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된다는 말을 하자 이 말을 들은 진주 강(姜)씨와 광주 이(李)씨가 입향하여 취락을 형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느 도승이 발견한 황호동산(黃虎童山, 현 옥시나무골) 옥녀동산(玉女童山, 현황골)과 두산밑 연못 옆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여 구암(龜石)이라 불러 왔으나 한때는 연못(둠벙)이 있는 곳이라 하여 한ㆍ일 합병 당시 둠벙을 한자화하여 지금의 두방(斗防)이라고 개칭하였다 한다.

    [척사,건지 (尺紗,乾池) : 보성읍 쾌상3리]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마을 뒷산(조리봉) 밑에 서당이 있어다 한다.(현재도 길의 흔적이 기와장 등이 있음) 마을뒷산 골짜기에 내려온 맑고 푸른물이 마치 비단같아서 산 좋고 물 좋은 경치를 보고 서당에 다니던 김해 김(金)씨란 분이 최초로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나 각 골짜기에 가가호호 흩어져 현재 각 성씨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당초에는 큰몰(大沒) 큰 산천이라 불리워 오다가 그후 큰몰에서 맑고 푸른물이 마치 비단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형(비단을 자로 재어서 멀리 흘러보내는 형)이라 하여 자세, 척사(澤紗)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하며 옛적부터 여러사람이 한데모여 살지 못하고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하여 건지(乾池) 일명 ‘건지메’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예동(禮洞) : 보성읍 옥암리]

    예동 마을은 고려말엽에 전의 이(全義 李)씨가 제일먼저 입향하여 취락을 형성하여 살아왔으나 다만 현존하고 있는 성씨중 본 마을 가장 오래 거주하여 내려오고 있는 성씨로는 수원 백(白)씨, 광주 이(廣州 李)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속칭 보성의 다섯 명당마을(당촌, 도개, 박실, 예동, 강골) 중 4번째에 속한다는 말이 있으며 옛날에 흔치 않았던 기와집들이 마을을 대부분 이루고 있다 동으로는 남산(南山), 재궁(才宮), 해경(解耕)남으로는 성곡(星谷), 구성(九星) 마을로 둘러쌓여 최초 마을 형성기부터 예의바른 마을이라 하여 예곡(禮谷)이라 부르고 하였으나 옛 옥암면(玉岩面)의 소재지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예동(禮洞)이라 부르고 있다.

    [남산,재궁 (南山,才宮) : 보성읍 옥암리]

    옥암리는 한때 보성군 옥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배합에 따라 남산리 예동리, 장변리, 이곡리, 해경리와 용문면의 연봉리, 강산리의 각 일부와 장흥군 웅치면의 신성리, 장병리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옥암면의 소재지었으므로 옥암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1554년경 장흥군 장평면에서 남산마을은 호조참의(戶曹參義)를 증직 받은 문현(文賢)이란 분이 최초로 입향하여 그의 후손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지금도 남평 문(文)씨 일촌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남산마을의 지명은 산의 형국이 남생이(거북)형으로 남생이 두 마리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당초에는 ‘남생’마을이라 부르다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남산(南山)이라 하였다 한다. 암(♀) 남생이 등에는 광주 이(李)씨 묘가 있으며, 숫(♂) 남생이 등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수령 300년)

    [해경,성곡(解耕,星谷) : 보성읍 옥암리]

    한때 옥암면에 속했던 이곳은 조선조 말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호조참의(戶曹參義)를 증직 받은 문현공(文賢公)의 후손들이 최초 입향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나 지금은 광주 이(李)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해경마을의 지명은 산고수청(山高水淸) 하고 마을앞 당산등(嶝)이 풍수지리학설로 ‘쟁기’의 성해 형국이라 하여 알해(解), 갈경(耕)이라 하였으며, 한 선비가 세상의 번자함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어느날 문득 득녘을 바라보니 농부가 일을 마치고 쟁기를 풀고 쉬고 있는 모습이 하도 한가롭고 아름답게 보여 갈고 수확하는데 좋은 곳으로 해경이라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성곡(星谷)마을은 매봉산 밑에 있는 마을로 주변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달(月色)이 보이지 않고 별빛만 반짝인다고 하여 성곡(星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탐진 최(崔)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고 있다.

    [유촌(柳村) : 보성읍 대야1리]

    유촌마을은 가신역(可申驛)이 있었던 마을로 그 시기와 역졸관리, 노비등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구전에 의하면 김해 김(金)씨, 밀양 박(朴)씨가 최초로 입향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 한다.
    고려시대 중기이후 조선시대까지 역(驛)이 있어 가신(可申) 또는 ‘가신역(可申驛)’으로 불리워지다가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한때는 유천(柳川)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촌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협촌(狹村) : 보성읍 대야1리]

    대야리는 한때 보성군 옥암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천리 관동리, 연화리, 가막리와 강산리 묘령의 각 일부와 장흥군 장동면의 마흘리, 율리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큰들이 있으므로 대야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협촌마을은 인근 유촌(柳村) 마을에 거주하던 한 주민이 이 골짜기에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최초의 입향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남양 전(田)씨가 오래 살았다 하나 현재는 김해 김(金)씨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 있었던 마을은 폐촌되고 빈터만 남아 있다하여 한때 ‘빈터’라고 불리웠으나 그후 물이 좋은 골짜기가 되어 마을이 형성되어 역촌(驛村)이라고 부르다 후세에 좋지 않다하여 협촌(狹村)이라고 하였다 한다.

    [관동(觀洞) : 보성읍 대야2리]

    관동마을의 형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중기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전해온다. 마을 앞에 넓은 들과 하천이 있이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으로 최초 광산 김(金)씨 15대 선조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여 그후 역(驛)부근의 마을이라 각처에서 몰려 들어와 현재의 마을이 되었다.
    장흥방면으로 가는 길목과 옥암면 예동부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마을로 한양에서 관리들이 공무차 이곳을 오면 이 마을에서 하루를 쉬어갔다 갓을 쓴 선비가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일명 갓동이라 부르다 왜정시대에는 산수가 수려한 곳이라 하여 관동(觀洞)으로 개칭 지금에 이르고 있다.

    [모령(茅嶺) : 보성읍 대야3리]

    모령마을은 조선중종때 사람으로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지낸 함양인 박이랑이란 분이 지금의 장흥 장동면 일대 사방이십리를 하사 받아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는데 그후 40년이 지난뒤 광주 이(李)씨등이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성군의 끝 마을로서 군계에 위치하여 장흥군 장동면과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하여 두미(頭尾)로 불렀으나(보성땅의 끝이요 장흥은 머리로 정함) 장흥의 법원과 검찰지청이 가까이 있다 하여 장흥쪽을 머리(頭)로 보았다 한다. 이후 이를 싫어한 마을사람들이 마을앞의 뛰재(뛰재茅 재嶺)의 이름을 따라 모령으로 불렀다 한다.

    [강산(江山) : 보성읍 대야4리]

    강산마을은 조선중엽(144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서 남양 전(田)씨가 최초 입향하여 취락을 형성하였다 하며 그후 1449년 초계 변(卞)씨, 광주 이(李)씨 등이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초기에는 해동(海東) 마을이라 부르다가 마을 뒷산이 씨래형국이며 마을 앞 옥암산은 '왕겨‘형국이라 마을 ’노적배늘‘형국이라 하여 강산(糠山)이라 불러 왔으나 최근에는 마을앞에 큰강이 있다하여 한자말을 바꾸어 강산(江山)이라 부르고 있으나 마을에서는 ’강산(康山)‘ 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연봉(連峰) : 보성읍 원봉1리]

    원봉리는 한때 보성군 옥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청리, 하청리, 도덕리, 송현리 일부와 용문면의 동외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원봉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연봉마을의 형성(形成)시기는 조선 숙종조 훈련원 판관을 지낸 김해인(金海人) 만백(萬白)이란 분이 강진에서 최초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쾌상, 옥암, 웅치, 장흥으로 가는 길목으로 윗주막 아래주막이 있었다는 구전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가뭄이 들어 예안 현감을 지낸 안범(安範)이란 분이 교(校)거리와 장거리에 큰 솥을 걸어 놓고 죽을 쑤어 오가는 사람을 구제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이 조그마한 산봉우리로 둘러 쌓여 있으며 마을 앞 연못에는 항상 연꽃이 피어있어 연꽃(連) 봉우리(蜂)을 본따 연봉(連峰)이라 하였다 한다.

    [송현(松峴) : 보성읍 원봉1리]

    송현마을은 연주현(延州玄)씨가 최초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나 형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므며 능성 구(綾城 具)씨 김해 김(金)씨 등이 입촌하여 이 마을에 살고 있으며 쾌상리로 가는 길목 아래 있는 마을로 양옆산에 아름드리 소나무 숲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솔(松)고개라고 부르고 행정구역 개편시 소나무(松) 고개(峴)자를 붙여 송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돌창(突倉) : 보성읍 원봉1리]

    돌창마을은 김해인 만백(萬白)의 후손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1914년 해방전만해도 김해 김(金)씨 자작일촌의 마을이었으나 그후 타마을로 이거 하여 현재는 각 성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 순천 도호부 관찰 9개읍면에 설치된 제민창(濟民倉)이 이마을에 있었다 하며 큰창고(倉庫)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돌창(突倉)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청,도덕(下靑,道德) : 보성읍 원봉2리]

    하청마을은 입향시기는 알 수 없으나 창녕 조(曺)씨가 최초 취락을 형성하여 잘았다 전하고 있다, 그후 전원인 송당 박시(松堂 朴時)가 입촌 그 후손들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봉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로 마을 뒷산 교봉산(校奉山)의 줄기를 타고 우뚝솟은 장봉산(長峰山)을 주봉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형국을 용(龍)이 승천하였다하여 청룡(靑龍)이라 했다 한다.

    [상청(上靑) : 보성읍 원봉2리]

    상청마을은 장원봉(長元峰)을 뒤로하고 버드제밑에 있는 마을이다 노동면에 거주하던 밀양 손(孫)씨가 최초 입향하였다 하나 입향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지금도 손씨들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뒤로는 장원봉 위로는 버드재가 있는 마을로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의 풍수지리설에 의한 형국이 용(龍)이 승천하였다 하여 청룡(靑龍)등을 중심으로 위아래 마을을 상(上)청-하(下)청이라 부른다.

    [시장(市場) : 보성읍 원봉3리]

    시장마을은 1950년 보성군 5일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원봉1리로 속하였으나 1973년 원봉3리로 구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일먼저 건립한 연엽초생산조합은 일제시대 때 녹차공장으로 운영되었고 해방후에는 고무신공장으로도 이용되었다.
    한때는 보성중학교 교실부족으로 교실로도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시외버스정류소가 신흥동 소재에서 1982년 본마을로 이전, 현재는 군민의 왕래가 제일 많은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소백산 줄기를 타고 마을뒤에 우뚝솟은 장봉산(300m)아래에 있는 마을이 원봉리이다. 산에 오르면 읍내가 내려다보여 이곳에서 제일 으뜸이 되는 봉우리 밑에 있다하여 으뜸 원(元) 봉우리 봉(峰)을 본땄다 하며 장터는 5일시장이 속해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場)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외(南外) : 보성읍 주봉1리]

    주봉리는 한때 보성군의 용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부곡리, 옥기리, 구게리, 내식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관주봉(군산천) 밑이 되므로 주봉리라 해서 보성읍에 편입되었다.
    남외마을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 청풍 노(蘆)씨가 백토(白土)로 사기그릇을 구우면서 살았다 하며 그후 조양 임(林)씨 등이 들어와 기와를 구웠고 낭주 최(崔)씨 등이 한집, 두집 모여 살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관주산(貫珠山, 冠珠山)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어느날 고을원님이 이 마을까지 왔는데 위치를 보니 이곳에 남쪽문을 두면 제일 좋을 것이라 하여 남문(南門)을 만들게 되었는데 남문밖에 있는 마을이하 하여 남외(南外)라 부르게 되었다.

    [구교(舊校) : 보성읍 주봉2리]

    주봉리(珠峰里)의 명칭을 낳은 주봉(珠峰)이 마을의 안산(案山)을 이루었으며 관주산(貫珠山)에서 이어온 산자락이 진산(鎭山)을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향교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개국초 처음으로 이곳에 향교를 지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이미 이때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최초의 입향 성씨는 하동鄭씨라 전해오고 있다.
    옛 향교 자리에는 지금도 하동 정(鄭)씨가 15대째 이어 살아오고 있다. 조선초 김유양(金有讓) 군수가 보성향교를 처음으로 이곳에 건립하여 보성유학의 산실이 되었으나 그후 기록에 의하면 경청산(경聽山) 서쪽으로 옮겼다 한다. 정유재란(1597)때 병화로 소실되어 향교를 지금의 동윤동으로 다시 옮겨 가게 되자 옛 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구교동(舊校洞)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오곡(悟谷) : 보성읍 주봉2리]

    오곡마을의 형성시기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최초입향은 진원 박(朴)씨가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보여지며 현재는 노동 등지에서 이거해와 여러 성씨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원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앞에 5일시장과 버스공용정류소가 있으며 마을저수지(沼岩堤)가 있다. 당초에는 마을에 버드나무가 있었다 하며 오류실(悟柳谷)- 오리실로 불러오다가 1914년에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지금의 오곡(悟谷)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도락(道樂) : 보성읍 주봉3리]

    도락마을은 덕산골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맛이 하도 좋아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뒷산에서 도굴꾼들에 의해 고려자기가 출토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상당히 오래된 마을로 추측되지만 최초의 입촌성씨는 알 수 없다.
    현재는 각 성씨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주봉리 산54번지 기슭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은 물맛이 천하일품으로 현재도 아침마다 물을 담아가는 사람들로 줄을 잇고 있다. 약수(藥水)물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道樂(도내기)라 한다. (일제말 가뭄이 들어 약수터밑에 저수지가 형성되었음.)

    [부곡(釜谷) : 보성읍 주봉3리]

    부곡마을은 옛날 남선북조(南宣北趙)라하여 선(宣)씨와 조(趙)씨가 살았다 한다. 이 마을에 선(宣)씨 선산과 조(趙)씨 선산이 잇는 것을 보아 이 두성씨가 최초로 입향하였다고 보여지며 고려자기가 출토되기도 한 마을이다.
    마을뒷산에 공주 이(李)씨 16대조의 묘가 있으나 공주 이(李)씨등은 오래전 고흥으로 이사하고 지금은 그후 입촌한 입보성 탐진 최(崔)씨가 9대조 묘가 있으며 현재는 여러 성씨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앞 주봉리 산48-1번지내 산의 형국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가마솥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하며 이 마을 형국 또한 가마솥 형국이라 釜谷(두무실)이라고 부르고 있다.

    [와장(臥獐) : 보성읍 용문1리]

    와장마을은 조선조초기에 형성되었다고 전해오며 보성강 상류의 기름진 만평뜰에 접해 있어서 인근에서는 비교적 잘사는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한때는 진원 박(朴)씨가 자작일촌으로 천석을 누리고 살았다 하나 현재는 여러성씨들로 마을이 구성되었다. 마을뒤로는 ‘구실고개’가 있으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형국이 노루가 길게 누워있는 모양이라 하여 와장(臥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성두(城頭) : 보성읍 용문1리]

    성두마을은 조선조말엽에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당초 와쟁(臥獐) 마을주민이 이마을로 이거하여 취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용문면이 있었던 때는 우시장(牛市場)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붐볐으며 여러마을 주민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초 와쟁이 마을에서 분리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작은 와쟁으로 불리어 오다가 옛보성의 성입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성두(城頭)라고 개칭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평(晩坪) : 보성읍 용문1리]

    용문리는 한때 보성군의 용문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탄리, 요평리, 우막리, 조현리, 석문리, 주음리와 노동면의 광탄리와 미력면의 가평리, 반암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소(沼)가 있었으므로 용문리라 해서 보성면(읍)에 편입되었다.
    만평 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당초 와장(臥獐)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와쟁이로 불리워 오다가 취락이 이루어지면서 우시장(牛市場)이 설치되었다 하여 우막동(牛幕洞)으로 개칭되어 부르다 늦게 부촌이 온다는 설이 있고 그 앞들이 넓은지라 만평(瞞坪)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평(妖坪) : 보성읍 용문2리]

    용문리는 1937년 행정구역 개편전까지는 용문면으로 존속되어 왔으며 요평마을은 정자천(程子川一名亭子川 : 보성강상류)을 마을의 형성시기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약200년전 낭주 최(崔)씨가 전주 강(姜)씨가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옛날 고을원님이 정자천으로 나들이를 갔는데 지나다보니 유독 소목이 울창하고 그 앞 들은 넓은지라 아랫사람에게 저곳이 어디인고? 하고 묻자 이름이 없음을 말하였다. 아예 원수님이 ‘수목이 우거지고 (妖 : 나무번성할요) 들이 넓으니 (平 : 탄탄할평) 요평(妖平)’으로 부르자고 해서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행정리동 지명으로는 요평(要平)으로 되었으나 잘못 기재된 것 같다.

    [봉탄(蜂灘) : 보성읍 용문3리]

    정지내(亭子川, 亭子川 또는 竹川)가에 형성된 이 마을은 인근 요평을과 비슷한 시기인 약 200년전 전주姜씨와 남주崔가 처음 입촌하였다.
    정지내(亭子川)가에 형성된 이 마을은 고을원님이 나들이하다 마을이름이 없다는 말에 마을 주변에 많은 벌떼가 날고 있고 정지내 밝은 물결이 벌떼처럼 밀린다 하여 물이 세월 흐르듯 하여 봉탄(蜂灘), 일명 번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